문을 밀고 들어서자 커피 향보다 먼저 휴대폰 진동이 팔을 간질였다. 사회자가 QR 코드를 띄우자 화면 위로 질문이 폭죽처럼 터졌다. “AI 모델 개발사도 국방 과제에 도전할 수 있나요?”, “초기 창업자에게 1년 차 현금흐름을 버틸 장치가 있나요?” 스크린 아래 “청년 창업 상상콘서트”라는 글씨가 밝게 번졌다. 9월 17일, 스타트업 스퀘어의 공기엔 묘한 낙관이 섞여 있었다. 낙관은 근거를 필요로 한다. 이날 정부는 청년 아이디어를 혁신으로 연결하겠다는 새 정책 비전을 꺼내 들었다. 숫자부터가 노골적이었다. 2030년까지 초기와 청년 창업가를 위해 벤처펀드 3조 원, 기술보증 8조 원. 합쳐 11조 원의 혁신자금이 시장으로 들어온다. 또다른 화면에는 13.5조 원짜리 이름, NEXT UNICORN Project. 딥테크 유니콘을 단계별로 키우겠다며 “집중투자”라는 단어를 여러 번 강조했다.

당신이 만약 취업 대신 창업을 고민 중인 스물여덟이라면, 혹은 동네 가게를 IT 서비스로 확장해 보려는 서른넷이라면, 이 숫자들이 구호로만 들릴 수도 있다. “좋아, 돈이 있다 치자. 내 차례는 언제 오지?” 그래서 이날 행사는 콘서트라는 이름을 달았다. 연설 뒤에 바로 질답, 그 옆에 IR 부스, 복도 끝엔 전시 존, 벽 하나 건너면 대·중견·공공기관과의 협업 테이블이 붙어 있었다. 말하자면 작은 생태계의 모형, 창업의 전 과정이 1층 평면도에 나란히 놓였다. 한 청년 창업자는 방위산업 전시 모형 앞에서 메모했다. “AI·방산·기후테크는 핵심 축. 정부 부처 간 협력… 우리 센서 알고리즘, 군수·환경 양쪽으로 패키징 가능?”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 성장사다리라면, 올해 출범한 국민성장펀드까지 이어진다 했지. 초기만 넘으면 그다음 발판이 있다는 뜻이야.” 현장에서 가장 실감났던 장면은 ‘창업 루키’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들렸다는 점이다. 모두의 창업 플랫폼과 창업오디션을 거쳐 1천여 명을 뽑고, 전문 AC·VC가 초기투자와 보육을 ‘벤처 스튜디오’ 방식으로 밀착 지원한다는 설명이 이어지자, 뒤쪽 의자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속삭였다.

“오디션이래. 끼 많은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가 팀으로 올라오겠네.” 오디션이라는 포맷은 잔혹할 만큼 솔직하다. 무대 위 5분, 시제품 1개, 고객 데이터 몇 줄. 그러나 무대가 있다는 사실은 창업자가 가장 필요로 하는 한 가지를 보장한다. 기회. 루키 프로젝트는 그 기회를 제도화한다. 초기의 ‘1’을 ‘10’으로 키우는 힘은 결국 반복 노출과 빠른 피드백에서 나온다. 물론 쇼케이스만으로는 기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는 판을 더 키우겠다고 했다. 40조 원 규모의 벤처투자 시장을 목표로 모태펀드 출자예산을 두 배로 늘리고 존속기간을 연장하겠다는 약속. 세제도는 창업—성장—회수의 전 주기를 따라 손질하겠다는 문장으로 묶였다.

실패를 자산으로 만드는 안전망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지금은 벤처투자조합·회사에 한정된 연대책임 금지조항을 창업기획자와 개인투자조합으로 넓히고, 재창업 청년을 위한 1조 원 규모의 ‘재도전 펀드’를 2030년까지 조성한다는 계획. 사업이 실패하면 사회적 낙인이 따라붙던 오래된 습관을 제도에서부터 바꾸려는 시도다.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다음 투자 문이 닫히지 않는다면, 창업자는 제품을 덜 두려운 얼굴로 만들게 된다. 국내만 보자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벤처 캠퍼스’라는 계획은 귀를 잡아끈다. 미국 현지에서 법률·회계·네트워킹·사무공간 등 통합 서비스를 제공해 정착을 돕겠다는 구상이다. 해외 진출이란 말은 종종 항공권 값처럼 비싸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착의 관건은 비행이 아니라 안착이다. 누구를 첫 고객으로 삼을 것인지, 어떤 표준과 공급망에 편입될 것인지, 어떤 자본과 어떤 마켓에서 성장의 레일을 깔 것인지. 현지의 첫 90일이 그 레일을 결정한다.

캠퍼스는 그 90일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에 ‘K-오픈이노베이션 허브’라는 이름의 협업 플랫폼이 더해진다. 대기업만 바라보지 않고, 중견·중소·공공기관까지 협력의 스펙트럼을 넓히겠다는 것. 구글·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와의 협업 기회 확대로 연결하겠다는 대목은, GPU가 인건비보다 비싼 시대에 특히 현실적이다. 기술의 계단은 갑자기 높아졌다. 그러니 계단참을 더 촘촘히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독자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듣기엔 좋다. 그런데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지?” 이날 무대 아래를 걸으며 들은 답을 적어본다. 첫째, 아이디어의 메시지를 사용자 행동으로 번역하라.

루키 프로젝트와 오디션은 ‘스토리’가 아니라 ‘행동 데이터’를 본다. 무료 트래픽 500명이라도 좋다. 사용자가 버튼을 몇 번 눌렀는지, 어디서 이탈하는지, 무엇을 다시 눌렀는지. 이 데이터가 초기투자 앞에서 유일하게 변명 없는 언어가 된다. 둘째, 기술의 핵심을 한 줄로 정리하라. 딥테크의 무대는 전문용어로 가득하지만, 집중투자 심사는 “무엇이 기존 한계를 깨는가”라는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델의 매개변수 숫자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물어야 한다. 셋째, 협업의 경계를 미리 넓혀라. 방산과 기후테크는 너무 멀리 있는 주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요가 명확한 산업이다. 규격과 테스트베드가 존재하고, 실패의 비용을 낮추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

덜 섹시하지만 더 빠른 데모가 가능하다.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창업자는 경영대 출신의 1인 창업가였다. 그는 투자 IR 한 켠에서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나는 딥테크가 아닌데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심사역이 웃었다. “딥테크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다만 AI 시대의 비즈니스는 모든 산업이 데이터 산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요. 당신의 서비스는 어떤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 데이터는 시간이 갈수록 어떻게 복리로 불어나는가. 그 설계가 있으면 됩니다.” 이 짧은 대화가 오래 남았다. 화려한 알고리즘이 없어도, 데이터의 복리 구조를 설계하는 순간 당신의 비즈니스는 AI 시대의 기하를 갖는다. 정부가 말하는 성장사다리도 이 논리 위에서만 의미가 생긴다.

사다리는 위로 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려오지 않기 위한 장치다. 매달 한 칸씩 올라가도, 어느 날 한 칸 미끄러져도 다시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여기서 딱 멈춰야 한다. 판을 깔고, 실패의 낙인을 줄이고, 초기의 문턱을 낮추는 것. 시장은 거기서부터 움직인다. 이날 장관은 하반기에 ‘벤처 4대 강국 도약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말의 무게는 결국 실행에서 나온다. 그러나 나는 현장에서 이미 첫 실행을 보았다. 행사장 한가운데서, 한 팀은 국방과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컨설턴트와 구조도를 그렸고, 다른 팀은 전시 부스에서 생소한 공공기관 담당자에게 사용자 페르소나를 설명했다. 또 다른 팀은 글로벌 빅테크 부스에서 크레딧 지원을 묻고, 자사 서비스의 GPU 사용 패턴을 보여줬다.

질문은 구체적이었고, 메모는 빽빽했다. 정책은 이처럼 자세한 질문들을 만날 때 비로소 작동한다. 당신에게도 오늘 할 수 있는 질문이 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데이터를 어디서 어떻게 모을 것인가. 그 데이터가 쌓일수록 더 좋아지는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그리고 다음 주, 누구의 문을 두드릴 것인가. 모두의 창업 플랫폼이든, 지역 보육기관이든, 대기업의 오픈이노베이션이든, 혹은 K-Startup 포털의 상담창구든. 최전선은 늘 멀리 있지 않다. 당신의 노트북, 오늘의 첫 이메일, 그리고 내일의 한 통의 전화에 붙어 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다시 QR 창이 떴다.
마지막 질문. “정책이 내 사업을 바꾸나요?” 나는 화면을 보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이 정책을 당신의 ‘다음 행동’으로 번역할 때만.” 루키를 향한 조명이 무대 위로 재차 비쳤다. 누군가는 벌써 내려와 투자 부스로 뛰어갔다. 우리는 종종 큰 숫자에 눈이 멀지만, 창업의 본질은 끝내 작고 느리다. 그래서 더 강하다. 11조 원이 있어도, 1개의 좋은 질문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1개의 좋은 질문이 있으면, 그 질문은 11조 원의 길을 스스로 찾아낸다. 그게 오늘 스타트업 스퀘어에서 내가 본, 가장 낙관적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