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문을 올리는 사장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우리 같은 작은 가게에 무슨 대기업 얘기냐” 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을 어떻게 끌어오고, 어디에 써서, 무엇을 줄일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동네 빵집이든 유제품 회사든 똑같다. 요즘 푸르밀이 보여준 행보는 그 질문들에 대한 비교적 선명한 답안을 보여준다. 2022년 사업 종료를 선언했다가 철회했던 그 회사가, 올해 서울 문래동 본사 사옥을 ‘신탁 담보’로 묶어 제1금융권 대출로 갈아탔다. 우선수익자로 시중은행과 카드사가 지정돼 있고 수익권리금 총액이 약 261억 원. 겉으로 보면 사옥을 잡혀준 또 한 번의 차입이지만, 속을 뜯어보면 재무 체질을 바꾸려는 의지가 읽힌다. 신탁 담보는 소상공인에게 다소 낯설 수 있다. 흔히 대출을 받을 때 근저당을 설정하는 것과 달리, 신탁은 소유권 자체를 신탁회사 명의로 옮기고,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을 ‘우선수익자’로 세팅한다.

이렇게 구조를 설계하면 일반 담보대출보다 한도가 넉넉해지는 경우가 많고, 채권 회수도 명확해진다. 물론 비용이 들고, 자산에 대한 통제권이 제한되는 부담이 있다. 푸르밀은 그 방식을 택해 제2금융권 중심이던 차입 구조를 갈아엎었다. 회사 설명처럼 신용등급이 올라 제1금융권으로 대환이 가능해졌고, 그 과정에서 신탁이란 그릇을 쓴 셈이다. 재무제표를 보면 2024년 말 기준 약 100억 원 규모의 2금융권 담보대출이 있었는데, 이를 정리하고 갈아탄다고 했다. 이 대목은 숫자의 크고 작음을 떠나 방향이 중요하다. 금리와 조건이 안정적인 돈으로 장부의 체온을 낮추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바꾸었다고 일이 다 끝나는 건 아니다. 푸르밀은 전주공장 가동을 멈추고 인력의 약 30%를 희망퇴직으로 줄였다.

품목을 덜어내고 수익성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OEM을 늘렸다. 표어는 “고객이 살린 기업”.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2023년 매출 692억 원, 전년 대비 5.6% 성장. 영업손실은 113억에서 28억으로 훅 줄었다. 재고자산은 53억에서 37억으로, 단기차입금은 697억에서 342억으로 내려왔다. 아직 흑자는 아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 적자’에서 ‘다음 분기엔 뒤집을 수 있다’는 무대로 옮겨왔다. 이 지점의 감각을 아는 사장님들이 많을 것이다.

통장 잔고의 기울기가 바뀌려면 매출만큼이나 구조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현장에서 배우는 포인트는 명확하다. 첫째, 비용 절감의 언어를 ‘한 번 줄이고 끝’이 아니라 ‘재설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 그냥 전기료 10% 절약, 인건비 몇 백만 원 삭감이 아니라, 공장 한 동을 멈추고 제품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는 일. 소상공인의 세계로 옮기면, 매출이 미미한 메뉴를 과감히 빼고 핵심 두세 개에 집중하거나, 재고회전이 느린 소재를 협력업체와 OEM·라벨 계약으로 돌리는 식의 발상과 닮아 있다. 둘째, 자금은 ‘싼 돈’으로, 그리고 ‘명확한 구조’로 바꿔야 한다는 것. 제2금융권에서 제1금융권으로 대환하는 순간, 이자만 줄이는 게 아니라 거래의 신뢰도가 바뀐다. 공급업체와의 결제 조건, 직원 채용과 유지, 심지어 임대인과의 협상에서도 “이 회사는 체계를 갖췄다”는 신호를 준다. 신탁 담보는 그 신호를 더 굵게 만든다.

자금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긴장도 풀려야 한다. 빌린 돈의 목적을 영업현장의 생존과 연결하는 루틴—예컨대 재고를 30일 안에 현금화하는 사이클을 지키는 습—을 만들지 못하면, 싼 돈도 금세 비싸진다. 셋째, 고객에게 말 걸기. “고객이 살린 기업” 같은 메시지가 냉소를 부를 때도 있지만, 푸르밀은 그 말을 실제 행동으로 끌고 가려는 모양새다. 커피 신제품 2종을 7월에 내놓고, 말차라떼 관련 상표권도 다수 출원했다. 이는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고객의 취향을 읽고 있다’는 선언과 같다. 브랜드는 공장 굴뚝에서 나오지 않는다. 카운터에서, 리뷰란에서, 출근길 편의점의 냉장 진열대에서 태어난다. 재무는 따뜻한 손님의 손길을 만나야 완성된다.

그러니 우리는 메시지를 반드시 행동과 짝지어야 한다. 동네 카페라면 원두 산지를 바꾸는 이유와 추출 프로파일을 손님에게 설명하는 것, 베이커리라면 재료의 날것을 보여주는 것, 미용실이라면 헤어 진단지를 만들어 첫 방문 고객에게 ‘나만의 처방전’을 쥐여주는 것 같은 실천이다. 표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표어가 행동의 이름표가 될 때 비로소 팔린다. 물론 위험은 남아 있다. 신탁 담보는 칼날처럼 양면적이다. 현금 흐름이 흔들리면 자산이 빠르게 묶인다. 우선수익자 구조에선 회복의 속도보다 회수의 절차가 더 빠를 수 있다. 그래서 설계의 단계에서부터 ‘이 돈은 어디까지가 운전자본이고, 어디서부터가 투자금인가’를 계획표로 분리해 둬야 한다. 월별 손익계산서에 준비금 라인을 하나 더 만들어 “예상 밖 수선·교체·환불·리콜” 같은 검은 백조를 위한 통로를 미리 열어두는 것이 좋다.

장부의 선이 굵어질수록, 위기의 곡선도 굵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푸르밀의 숫자들은 ‘버티는 것’과 ‘바꾸는 것’의 경계에서 얻은 성과다. 매출 692억, 영업손실 28억. 이 정도면 “다음 시즌에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하지만 기대는 전략의 다른 이름이어야 한다. 신제품을 더 내놓을수록 SKU의 생애주기를 짧게 관리해야 한다. 잘 팔리는 것에 재고와 광고를 몰아주고, 애매한 건 6주 안에 퇴장시키는 규율을 세워야 한다. OEM을 늘릴수록 품질 규격을 더 엄격히 잡아야 한다.

위탁 생산 파트너가 늘수록 클레임의 분모도 커진다. 클레임 한 건은 SNS에서 열 건, 백 건의 도달로 번식한다. 현장에서 쓰는 체크리스트를 보여주고, 개선 주기를 함께 공개하는 투명함이 브랜드의 면역력을 만든다. 이야기를 다시 당신의 가게로 가져오자. 지금 당장 신탁 담보가 필요하진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의 ‘대환 시나리오’를 준비하자. 어떤 조건이면 현재 대출을 갈아탈 수 있는지, 어떤 담보를 어떻게 써야 한도가 넓어지는지, 그때 비용과 제약은 무엇인지. 거래하는 은행의 계정관리자와 한 번 더 통화해 신용등급을 올리는 체크포인트를 확인해 두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이다.

재고표에서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항목을 골라 OEM으로 돌릴 수 있는지, 혹은 아예 빼버릴 수 있는지도 따져보자. 한 달에 한 번 매장 앞에서 고객에게 직접 묻는 시간—“요즘 우리 집에서 제일 자주 사가는 건 뭐예요?”—을 갖는다면, ‘팔리는 것에 집중한다’는 전략은 현장 언어를 얻게 된다. 기업이든 가게든 위기 뒤의 길은 비슷하다. 돈의 온도를 낮추고, 몸집을 가볍게 만들고, 고객을 향해 더 또렷한 목소리로 말한다. 푸르밀은 아직 완전한 흑자가 아니다. 그러나 숫자들이 가리키는 나침반은 분명 북쪽을 향한다. 중요한 건 그 나침반을 우리 카운터 위로 옮겨오는 일이다. 내 가게의 신용을 한 단계 올리고, 가장 잘 팔리는 한두 가지를 더 잘 팔리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현금을 다시 구조에 투자하는 반복.
작은 가게의 사장님들이여, 대기업의 사옥에 걸린 신탁 등기를 보며 한숨만 쉬지 말자. 그들의 재무설계에서 우리가 당장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적지 않다. 오늘 장부의 한 줄을 지워보자. 오늘 메뉴판의 한 줄을 바꿔보자. 그리고 오늘 거래처 한 곳과 통화해 더 나은 조건을 물어보자. 위기에서 길을 만드는 법은 거창한 비법이 아니라, 관계와 구조, 그리고 숫자를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게 하는 습관이다. 그 습관을 시작하는 데는 거대한 사옥도, 복잡한 신탁 계약도 필요 없다. 당신의 오늘만 있으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