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에서 김 사장은 가계부를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지난달엔 카드 수수료와 임대료, 알바 시급 인상이 한꺼번에 겹쳤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법’이었다. 간판을 옮기며 구청 신고를 하루 늦췄다가 과태료가 날아온 적이 있고, 업체가 바뀐 택배 단말기를 늦게 등록했다가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장을 받았다. 그때부터 김 사장은 머릿속으로 숫자보다 조문을 더 자주 세게 됐다. “혹시 이것도 형사처벌인가요?”가 그의 입버릇이었다. 그런 김 사장에게 지난 9월 18일, 국회에서 들려온 소식은 묘한 안도와 새로운 걱정을 동시에 안겼다.

더불어민주당이 경제형벌을 합리화하겠다며 ‘배임죄 폐지 또는 완화’까지 포함한 대안을 이달 중 1차로 내놓겠다고 예고한 것이다. 경영 의사결정이 형사법의 칼날에 과도하게 노출돼 왔다는 진단과 함께, 형벌은 줄이고 대신 민사책임—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 디스커버리—을 강화하겠다는 큰 방향이 제시됐다. 18일 열린 TF 2차 회의에서 이 방향이 재확인됐고, 형법·상법·특가법 등 여기저기 박혀 있는 배임 관련 조항의 정비 가능성까지 언급됐다. ([YouTube][1]) ‘배임’이라는 단어는 보통 대기업 총수나 전문경영인의 법정 공방에서 들려오지만, 실제 그 영향은 의외로 가까이 있다. 법조문 속 배임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손해를 가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호하다. ‘임무’는 어디까지고, ‘위배’는 누가 어떻게 판단할까. 대법원은 구체 사안마다 세밀하게 기준을 쌓아왔지만, 현장에선 그 세밀함이 곧 예측 불가능성으로 받아들여졌다.
단골 거래처에 가격을 조금 더 깎아줬을 뿐인데, 회사의 이익을 해친 ‘임무위배’가 되지 않을까. 법률 자문 한 번 없이 해온 ‘감(感)의 결정’이 검찰 수사 대상이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우려가 기업의 발목을 잡아왔다는 건 많은 실무가들의 공통 경험이다. 관련 판례만 수천 건에 이르고, 특가법의 가중처벌 규정까지 얽히면 형량의 리스크는 더 커진다. ([법제처][2]) 정치권이 칼끝을 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배임죄를 ‘폐지’할지, 아니면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문에 명시해 형사책임의 문턱을 높일지, 아니면 ‘대체 입법’으로 쪼개고 다듬을지. 동시에, 형벌을 줄이는 대신 민사책임을 키워 균형을 맞추자는 쪽으로 얘기가 흐른다. 이때 등장하는 게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 그리고 디스커버리(증거개시)다. 정부·국회는 몇 년간 이 조합을 놓고 널뛰기를 반복했다. 코로나 시기 ‘전면적 집단소송법’ 입법예고가 나왔다가 진도가 멈췄고, 이후 분야별·쟁점별로 다시 조정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올여름에도 국가정책조정기구가 대한변협과 만나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를 논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형사에서 민사로’라는 추세는 방향 자체로는 큰 반전이 아니다. 다만 정권과 정당을 넘어 공감대가 넓어졌다는 점이 이번 이슈의 온도를 바꾼다. ([법무부][3]) 여기까지 들으면 소상공인·중소기업 대표들은 잠깐 미소 지을 수 있다. “형사처벌 완화.

하마터면 전과자가 될 뻔했다” 같은 심정 말이다. 실제로 숙박업소 상호 변경을 제때 신고하지 못했다고 벌금형이 떨어지는 사례가 있고, 영업장 이전 신고가 늦었다고 수사기관 문턱을 밟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배달 로봇 같은 신사업에서는 작은 부품을 교체했는데도 전체 안전인증 변경 절차가 지연됐다는 이유로 형사 리스크가 제기되는 등, 현장의 감각으로는 ‘실수에도 형사’가 과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합리화는 분명 필요하다. ([로앤비][4]) 하지만 미소는 여기까지만. 형벌의 그늘이 걷힌 자리엔 민사책임의 빛줄기가 더 강하게 내려칠 수 있다. 집단소송은 말 그대로 ‘모여서 한 번에’ 묻는 절차다.
지금도 증권 분야에는 집단소송제가 있고, 소비자단체소송이라는 경로가 존재하지만, 적용 범위가 좁고 입증과 절차문턱이 높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반복돼 왔다. 전면적 또는 포괄적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그동안 어렵던 ‘작지만 많은 피해’가 소송의 장으로 올라오기 쉬워진다. 식품표시 오류, 환불정책의 불공정 조항, 개인정보 처리의 소홀 같은 일들이 대표 사례가 된다.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은 고의성·중과실이 인정될 때 실제 손해액을 넘는 배상을 명할 수 있게 하고, 디스커버리는 소송 당사자에게 상대의 자료를 내놓게 하는 제도라서 ‘문서가 없으면 이긴다’는 오래된 통념을 뒤집는다. 입법 설계에 따라 강도는 오르내릴 수 있지만, 큰 줄기는 분명해 보인다. ‘형사 대신 민사’는, 제대로 정비되면, ‘무고한 자에게 형사적 낙인을 찍지 않되 잘못의 비용은 반드시 치르게’ 하는 체계다. ([네플라(NEPLA)][5]) 그렇다면 동네 빵집 사장, 10인 규모 부품업체 대표, 플랫폼을 막 띄운 창업자에겐 무엇이 달라질까.

먼저, 사소한 행정실수가 형사로 비화될 가능성은 낮아질 수 있다. 신고 누락, 스티커 규격 착오, 라벨 표기 미비 같은 것들이 경고-시정명령-과태료 같은 행정·질서벌의 사다리에서 해소될 여지가 커진다. 그리고 ‘배임’이라는 칼날이 경영판단의 영역에서 한 걸음 물러나면, 가격 인센티브나 거래선 교체 같은 실무적 결정을 둘러싼 형사 리스크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다만 ‘민사의 파도’는 더 높아질 수 있다. 동일한 오류로 수십, 수백 명의 고객이 불편·손해를 입었다면, 그동안은 민원이 흩어지고 보상이 자율적으로 끝났을 일이 집단소송의 문턱을 넘어 법정으로 들어올 수 있다. 판결금만이 아니다. 소송비용, 브랜드 평판, 대표자의 심리적·시간적 부담까지 비용 항목은 길어진다. 이쯤 되면 자구책은 뻔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뻔한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패다. 우선, 기록의 습관을 바꾸자. 메뉴 가격을 300원 내릴 때도 왜 내리는지, 거래처 A를 버리고 B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공급망 리스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날 회의에서 누가 무엇을 말했고 어떤 대안이 검토됐는지 간단한 메모를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사후 방어의 절반은 끝난다. 대기업처럼 이사회 의사록을 정교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라인 단톡방 캡처, 클라우드 문서의 버전 히스토리, 거래처와의 이메일 스레드가 훌륭한 디스커버리 대응 자료가 된다. 증거개시의 시대엔 ‘없는 자료’가 아니라 ‘엉성한 자료’가 더 위험하다.
엉성함 속에서 악의와 은폐의 그림자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약관·표준계약서·구두합의의 사이를 메워라. 배달앱을 통해 판매하는 사장이라면 환불·교환·지연배달 보상 정책을 ‘앱 안’과 ‘매장 안’에 동일하게 걸어두자. 소비자에게 불리한 조항은 가급적 피하고, 불가피하면 큼지막한 글씨로 눈에 띄게 고지하라. 플랫폼과의 수수료 조정, 광고비 환급, 배송 분쟁 등은 표준계약서로 가는 게 최선이고, 최소한 이메일로 합의의 흔적을 남겨라. 민사는 ‘보여줄 것’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셋째, 보험을 다시 보자. 영업배상책임보험은 소규모 사고에만 쓰는 게 아니다. 개인정보 유출, 제품책임, 화재·누수로 인한 이웃 피해 등 사건의 성격이 다양해질수록 특약의 유용성은 커진다. 보험사는 소송 관리 능력도 갖고 있다. 방어를 혼자 끌어안지 말고, ‘보험을 통해 전문성을 빌리는’ 전략을 고민하자. 넷째, 내부 고발과 고객 불만의 ‘얼리 워닝 시스템’을 마련하라. 집단소송 시대의 위기는 조용히 자란다. “이거 좀 이상한데요?”라는 직원의 귓속말, “환불 규정 너무 빡센 거 아니에요?”라는 고객의 DM이 가장 싼 값의 경고장이다.

가게 카운터 옆에 불만 QR을 붙이고, 익명 제보를 받는 구글폼을 만들고, 월 1회 15분짜리 ‘리스크 회의’를 열어라. 그 자리에서 최근 클레임을 목록화하고 패턴을 찾는 것만으로도, 민사 리스크의 70%는 예방된다. 다섯째, 대표가 모든 것을 떠안는 문화를 조금만 바꾸자. 배임 논란이 쉬워진 배경엔 ‘대표 중심 의사결정’의 취약함도 있었다. 작은 조직일수록 그렇다. 5명이라도, 한 번의 큰 결정에 2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두고, 반대 의견을 적어두라. 나중에 돌아보면 그것이 ‘경영판단의 원칙’을 현실에서 입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된다. 이 논의가 정치권에서 한동안 공전해왔다는 냉소도 있다. ‘또 제도 손본다면서 말만 요란할 것’이라는 회의다. 그러나 이번엔 현장의 사례가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다는 점이 다르다. 숙박·미용업의 사소한 변경신고 누락에 형벌이 부과됐던 현실, 신기술 영역의 인증 절차와 형사 리스크가 충돌했던 사례들이 ‘합리화’의 근거로 채택됐다. 그래서다. 법률이 바뀌면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형벌의 공포가 물러난다고 해서 안도에 취하면 곤란하다.
우리에겐 ‘보상과 책임의 기술’을 새로 익힐 시간이 왔다. ([로앤비][4]) ‘형사에서 민사로’는 단순한 말바꾸기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예전엔 신호 위반 한 번에도 형사법정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신호등 체계가 더 촘촘해지고, 잘못 지나가면 과태료·벌점이 쌓여 면허를 잃을 수 있는 구조가 된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공평하냐고 묻는다면, ‘예측 가능한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공평하다. 형사처벌의 낙인은 가볍지 않다. 재취업, 대출, 비자 발급, 심지어 동네에서의 명예까지 흔들 수 있다. 그 무게를 줄이는 대신, 불법·부당에 대한 비용은 민사로 분명히 물린다. 시장의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이다. 문제는, 준비다. 소상공인·중소기업의 준비는 화려할 필요가 없다. 체크리스트 하나면 충분하다. 첫째, 신고·인증·허가의 기본기를 다시 깐다. 영업장 변경, 상호 변경, 라벨 표기, 개인정보 처리방침 업데이트 같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을 월간 점검표로 만든다. 둘째, 고객 커뮤니케이션을 업데이트한다.

환불·교환·지연배달·품절 정책을 ‘고객이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에 일관되게 걸고, CS팀이나 카운터 직원이 상시로 꺼내 읽을 수 있게 만든다. 셋째, 공급망 계약을 다시 본다. 납기 지연·품질 하자·리콜 시 비용 분담 조항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다면 간단한 부속합의서라도 체결한다. 넷째, 기록의 습관을 들인다. 가격 변경, 이벤트 시행, 거래선 변경 등 중요한 결정의 배경과 대안, 기대효과와 리스크를 5줄만 적어도 된다. 다섯째, 보험과 법률 자문을 ‘연 1회 점검’으로 정례화한다. 이런 루틴이 재미없고 귀찮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가 마케팅에 들이는 시간의 10%만 법무 루틴에 투자해도, 민사 리스크는 비약적으로 줄어든다.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박 대표는 최근 반품 규정을 다시 썼다. ‘포장 훼손 시 반품 불가’라는 문구 대신 ‘훼손 정도와 재판매 가능성을 기준으로 부분 환불 또는 교환’으로 바꾸고, 포장 상태 사진을 고객이 쉽게 올릴 수 있는 폼을 만들었다. 클레임은 조금 늘었다. 그러나 악성 민원은 줄었다. 불만이 ‘프로세스’로 들어온 덕분이다.
다음 분기부터는 그 데이터를 분석해 포장재를 바꾸려 한다. 비용이 들지만, 박 대표는 “이게 내년에 소송비용 안 쓰는 길”이라고 말한다. 배임 논의로 돌아가 보자. 배임의 공포가 강했던 건 조문이 모호해서만이 아니다. 우리 조직이 ‘나만의 판단’에 의존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메커니즘이 단순하면, 책임의 화살은 한 사람에게 쏠린다. 반대로, 동료의 동의와 반대가 기록으로 남아 있으면, 같은 결정이라도 ‘합리적 경영판단’의 외피를 갖춘다. 입법부가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문에 새긴다면—혹은 폐지에 가까운 수준으로 좁힌다면—그건 ‘잘 기록되고 공유된 판단’을 전제로 한다. 이게 우리 쪽 숙제다. ([로앤비][4]) 정치의 시계는 언제나 느리고, 때로 엇박자다. 이번에도 발표 시점이 미뤄지거나, 다른 이슈에 밀려 속도가 줄 수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흐름은 분명하다. 광범위한 경제형벌을 줄이고, 민사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 이 흐름은 한국의 기업 환경을 ‘공포에서 예측으로’ 옮겨놓을 수 있다.

법무부가 과거 전면적 집단소송 도입을 입법예고하면서 던졌던 질문—“광범위한 집단 피해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구제할 것인가”—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 해답은 조금씩 현실로 가까워지고 있다. ([법무부][3]) 밤 11시, 파라솔 아래의 불빛이 꺼질 시간이다. 김 사장은 노트를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오늘의 할 일을 적는다. “상호 변경·가격표 정비·환불정책 통일·회의 메모 5줄.” 법이 바뀌면 세상도 바뀔까. 아마 천천히, 그리고 불균등하게 바뀔 것이다. 대신 확실한 게 있다. 내 장부, 내 약관, 내 메모는 오늘 밤 바로 바꿀 수 있다.
이번 주에 하나만 고친다면 무엇을 먼저 할까. 직원 단톡방 상단에 ‘환불·교환 원칙’을 고정해두는 일. 아니면 다음 주 월요일 아침 10분을 ‘리스크 점검’ 시간으로 붙여넣는 일.

대단한 건 없다. 다만, 다음 분기에도 파라솔 아래에서 같은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한 아주 구체적인 한 걸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형사의 공포가 줄어드는 시대에 민사의 파고를 견디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파제일 것이다.

[1]: https://www.youtube.com/watch?v=130y6nkZrl4&utm_source=chatgpt.com "[생중계] 더불어민주당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TF 2차 전체 ..." [2]: https://www.law.go.kr/precInfoP.do?precSeq=146901&utm_source=chatgpt.com "판례 >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배임)" [3]: https://www.moj.go.kr/moj/209/subview.do?enc=Zm5jdDF8QEB8JTJGYmJzJTJGbW9qJTJGMTU3JTJGNTMxNjIxJTJGYXJ0Y2xWaWV3LmRvJTNGcGFzc3dvcmQlM0QlMjZyZ3NCZ25kZVN0ciUzRCUyNmJic0NsU2VxJTNEJTI2cmdzRW5kZGVTdHIlM0QlMjZpc1ZpZXdNaW5lJTNEZmFsc2UlMjZwYWdlJTNEMSUyNmJic09wZW5XcmRTZXElM0QlMjZzcmNoQ29sdW1uJTNEc2olMjZzcmNoV3JkJTNEJUVDJUE3JTkxJUVCJThCJUE4JUVDJTg2JThDJUVDJTg2JUExJTI2&utm_source=chatgpt.com "법령/자료>법령정보>입법 예고>집단소송법안 입법예고" [4]: https://www.lawnb.com/Info/ContentView?sid=N000C3DBB8CEAEC9&utm_source=chatgpt.com "與,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TF 발족…배임죄 완화 등 논의" [5]: https://www.nepla.ai/wiki/%EB%AF%BC%EC%82%AC/%EB%AF%BC%EC%82%AC%EC%86%8C%EC%86%A1/%EC%9A%B0%EB%A6%AC%EB%82%98%EB%9D%BC%EC%9D%98-%EC%A7%91%EB%8B%A8%EC%86%8C%EC%86%A1-j3wnkdwd9y6k?utm_source=chatgpt.com "우리나라의 집단소송 | 민사소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