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엑스 3층 복도는 아침부터 번들거렸다. 불투명한 네임텍을 만지작거리던 사장님들이 서로의 로고를 눈으로 훑고,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인사말이 공기를 찔렀다. 부스 사이로 지나가다 보니 “Global KAPP Festival”이라는 현수막 아래, 막 발표를 끝낸 창업팀이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오늘 여기서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한 가지는 뭘까. 정부 사업. 해외 네트워킹. 아니면 어제보다 더 단단해진 확신.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내에서 잘하던 습관”이 “글로벌에서 먹히는 원리”로 바뀌는 정확한 순간을 직접 본다는 것이다.

첫 세션은 성과 보고였다. 보통 이런 자리는 숫자와 스크린샷이 지루하게 흐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스토리였다. 뉴욕, 보스턴, 싱가포르, 텔아비브를 찍고 온 팀들이 무대에 올라 “우리가 뭘 했고, 무엇이 틀렸고, 무엇을 바꿨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KAPP라는 제도적 우산이 비를 막아주었을지 몰라도, 실제로 발을 적시고 길을 택한 건 결국 창업자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발자국에는 우리 같은 소상공인에게 유효한 힌트가 촘촘히 남아 있었다. 요쿠스의 이야기가 특히 귀를 사로잡았다. 오디션 플랫폼—듣자마자 알고 있는 단어들이 조합되었지만, 그들의 첫 무기는 의외로 ‘홍보’가 아니었다. “오디션”이라는 보편 키워드에 기능을 정확하게 맞추자 글로벌 검색이 자발적으로 유입을 끌어왔다.

비용 대신 구조를 설계한 셈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무료 앱에 익숙한 문화는 결제의 벽이 되었고, 미국이라는 메카를 향해 팔을 뻗자 팔꿈치가 아팠다. 그때 그들은 국가 지원 프로그램의 문을 열었다. 정부 깃발 아래 입장하면 단기간에 중요한 사람을 연쇄적으로 만날 수 있다—이건 그들이 직접 증명했다. 미국 동부의 굵직한 오디션 운영사와 배우 에이전시, 거대 레이블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내년 1월 법인 설립이라는 타임라인을 손에 쥐었다. 여기서 배울 점은 간단하다. 우리 제품의 핵심 검색어가 세계 공용어라면,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발견성’ 설계부터 완성하라. 그리고 돈이 흐르는 본무대—미국이든 어디든—로 들어갈 통로는 네트워크의 속도전을 통해 확보하라. 노크의 ‘Cloud Vision’은 다른 어조였다. 셋톱 박스로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통합 관리한다—문장만 보면 B2B 냄새가 진하게 난다.

그들은 이스라엘로 건너가 가속기와 네트워킹을 통해 자기 기술을 거울 앞에 세웠다. “우리가 잘난 줄 알았는데, 더 잘난 팀이 저기에 있더라”는 깨달음은 자존심을 구기는 대신 제품의 각도를 조정했다. 그 결과는 숫자로 돌아왔다. 국내 중심이던 사업 전략을 해외 중심으로 재정렬하고, KT·CU·코엑스 같은 파트너십을 따내며 견적 건수와 총액이 20배로 뛰었다. 우리에게는 이 케이스가 이렇게 번역된다. 기술은 ‘대화’에 넣어야 가치가 증명된다. 낯선 시장의 질문들—“왜 지금 당신이어야 하죠?”—에 답하면서 제안서의 언어가 바뀐다. 그리고 큰 손과 손을 잡을 때까지, 그 질문을 100번은 듣겠다는 마음의 체력부터 준비하자. GK프로젝트의 iPlan은 소프트웨어의 기본기를 재확인시켰다. 1년 동안 26번의 업데이트.

꾸준함을 숫자로 보여주는 데 이만한 문장이 없다. 한국과 18개국에서 유료 생산성 1위를 차례로 찍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잘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막혔다. 언어 문제가 아니라 니즈의 번역이 어긋났던 것이다. 그들은 전문가·사용자 테스트를 깔고, 심층 리뷰를 보고서로 받으며 마케팅 채널의 구조를 다시 짰다. 그렇게 “미국 유료 랭킹 10위권”이라는 구체 목표를 얻었다. 이 장면은 우리 가게, 우리 브랜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주, 작게, 정확히’ 고친다는 태도. 같은 제품이라도 동네가 바뀌면 쓰임이 바뀐다는 상식.

그리고 목표는 ‘멋있어 보이는 슬로건’이 아니라 ‘돈으로 측정 가능한 등수’일 때 추진력이 생긴다는 사실. 오스앤아스의 음주 측정기 앱은 기술과 규제의 경계에서 기회를 찾았다. 프랑스에서 차량 내 개인용 장비 장착 의무화가 예고되자, 그들은 계측기 시장을 스마트폰 액세서리 시장으로 넓게 그렸다. 나라별 볼륨 측정값이 달라 표준 신뢰도가 흔들리자 주파수 모드로 전환해 정확도를 보강했다. 동시에 유럽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아바타 디자인을 업그레이드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교훈이 숨어 있다. 첫째, 규제 변화는 비용이 아니라 시장의 문이 된다. 둘째, 측정은 곧 신뢰다. 데이터를 보여줄 때 ‘왜 이 숫자를 믿어야 하는가’에 먼저 답해둬야, 그 다음 스토리—얼굴 인식, 소셜 기능—가 반짝인다.

세 팀의 공통분모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말”을 줄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설명을 덜고, 상대가 이해하는 포맷으로 말을 갈아입혔다. 뉴욕에서는 숫자를, 텔아비브에서는 문제정의를, 싱가포르에서는 레퍼런스를, 보스턴에서는 논리를 앞세웠다. 같은 제품이라도 시장마다 ‘들어가는 문’이 다르다. 문이 좁다면 제품을 줄여서라도 통과시키는 기민함—그게 글로벌의 문법이다. 또 하나, 오늘 무대에서 자주 나온 단어는 ‘속도’가 아니라 ‘속도감’이었다. 진짜 속도가 빠른지보다, 상대가 느끼는 속도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메일 회신이 24시간을 넘기지 않는 것, 회의가 끝나면 48시간 내에 샘플이나 데모 링크를 보내는 것, 협업 제안에 다음 스텝을 명확히 적어주는 것. 이런 작고 반복적인 타이밍이 신뢰를 만든다.

해외에서 브랜드가 없을수록, 속도감은 곧 신뢰의 대리인이다. 정부 지원의 역할도 다시 보였다. 흔히 “지원사업은 공문과 정산의 바다”라고 툴툴대지만, 오늘 팀들은 다른 그림을 보여줬다. 지원사업의 본질적 가치는 ‘문을 여는 힘’이었다. 단기간에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초대장, 현지 테스트에 바로 들어가는 패스트트랙, 그리고 실패를 학습으로 바꾸는 구조적 의무감. 예산의 숫자보다 소중한 것은, 그 예산을 지렛대 삼아 다음 칸으로 이동할 수 있게 설계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일 무엇부터 바꿀 수 있을까. 첫째, 우리 서비스의 핵심 키워드를 세계 공용어로 재정의하자. 검색·스토어·커뮤니티에서 그 키워드로 발견되는지 점검하고, 발견을 위해 제품 구조를 손보자.

둘째, 목표 시장 하나를 정해서 ‘첫 90일’을 설계하자. 누구를 만나고, 어떤 테스트를 돌리고, 어떤 자료로 대화할지 달력에 박아 넣자. 셋째, 측정 체계를 제품보다 먼저 만들자. 어떤 수치가 설득을 만들고, 그 수치를 어떻게 수집·표준화·시각화할지 정리하자. 넷째, 속도감의 리추얼을 팀 문화로 박제하자. 회신·데모·후속안의 타임박스를 정하고 모두가 지키는 게임으로 만들자. 나는 행사가 끝나고 로비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마셨다. 각 팀이 걸어온 거리는 제각각이었지만, 도착지는 비슷했다. “생존이 아니라 확장.” 확장은 더 많이 파는 것이 아니라, 더 명확하게 설득하는 것이다.

설득은 네트워크에서 시작해 데이터로 완성되고, 그 사이를 속도감이 메운다. 그리고 오늘, 당신은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배우고 돌아간다.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휴대폰 메모를 킨다. 해야 할 일이 선명해진 날은 흔치 않다. 제품 페이지의 키워드를 다시 쓰고, 다음 주에 보낼 3통의 메일을 적어본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다음 미팅에서는 이 지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48시간 안에 데모 버전을 공유하겠습니다.” 누군가는 이 단순한 문장들을 들으면 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무대 위의 팀들은 모두 이 단순함으로 세계의 문턱을 넘어갔다. 우리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다음 번 페스티벌의 무대에는, 당신의 슬라이드가 올라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