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열리지 않는데 사람은 계속 들어왔다. 종로 한복판, 마이크임팩트 13층 엠스퀘어. 당신이 엘리베이터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건 공기 속에 떠다니는 미세한 전류였다. 42팀이 3분씩, 긴장과 자신감을 번갈아 쏟아내려 대기 중인 공간에서, 사람의 체온과 목소리는 곧 에너지의 통화가 된다. “세 분 후 입장하실게요.” 진행요원이 메트로놈처럼 시간을 잘랐다. 사실 이 하루의 승부는 180초 안에 다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 180초가 앞으로의 18개월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공기의 밀도를 늘렸다. 행사의 방식은 생각보다 영리했다. 앞쪽은 무대, 뒤쪽은 네트워킹. 발표가 끝나면 창가 쪽 스탠딩 테이블에서 투자자들이 손짓했다. “지금 바로 얘기합시다.” 어떤 팀은 피칭을 마치기도 전에 명함 케이스가 반쯤 비어갔고, 어떤 팀은 자리로 돌아와 슬며시 노트북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긴장은 공평했고, 기회는 불평등했다. 하지만 이 조합은 묘하게 공정하게 느껴졌다. 최소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차례가 오고, 억지로 끼어드는 사람에게는 이야기의 여지가 있었다. 무대에 선 이들은 스스로의 시간 관리자가 되어야 했다. 첫 15초에 문제를 깨물어야 하고, 다음 60초에 해결을 보여줘야 하며, 그 이후는 증거와 미래를 동시에 던져야 했다. “우리는 오디션 플랫폼입니다. 오디션은 많은데 실력은 왜 발견되지 않을까요?” 요쿠스의 문장은 질문으로 시작해 데이터로 마무리됐다. “클라우드 비전이 사진을 읽고, 사용자는 기억을 정리합니다.” 플라스크앱스는 albu+m을 보여주며 노인 사진 관리라는 의외의 타깃을 꺼냈다. JTIES의 애니 보이스 톡은 귀여운 캐릭터로 방심을 유도했지만, 사용자 체류 시간을 묻는 질문엔 “평균 9분 40초”를 날카롭게 적중시켰다. 가장 큰 함정은 스토리텔링의 감정에 취해 시간을 잃는 것이었다. “저희 팀은 세 번의 피봇을 거쳤고요, 사실 처음에는…” 진행요원의 ‘원 미닛’ 사인이 허공에 뜨자 대표의 목소리가 급히 빨라졌다.

어느 투자자가 속삭였다. “본질은 좋네요. 내일의 로드맵 대신 오늘의 리텐션을 주세요.” 이 피드백은 그날의 축약판이었다. 비전은 기대되지만, 데이터가 돈을 움직인다. 3분은 감동하기엔 짧고, 결제하기엔 충분했다. 바깥쪽 테이블에서는 저마다의 4문4답이 돌아갔다. 시장. 경쟁. 차별화. 숫자. 요건은 비슷했지만 대화는 각자 달랐다.

링크드브레인의 바이크 케어 앱은 계절성 질문에 “자전거는 봄가을에만 타지 않습니다, 출퇴근입니다”로 받아쳤고, 노크의 Cloud Vision은 “정확도 97%는 누가 검증했나요?”라는 질문에 준비한 샘플셋을 바로 시연했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퍼블리싱 계약의 예비 이야기를 땄고, 누군가는 특허 범위를 다시 검토해보라는 숙제를 받았다. 묘하게도, 고개가 깊게 끄덕여지는 피드백만큼 아픈 말이 오래 남았다. 창업진흥원의 프로그램은 ‘사전’과 ‘사후’가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단지 발표 무대가 아니라, 발표를 잘 하기 위한 훈련과 끝나고 난 뒤의 코칭이 세팅돼 있다. 덕분에 말줄임표 대신 콤마가 많았다. “우리는 A를 만들었고, B로 검증했고, C에서 확장할 겁니다.” 문장 구조는 단순했지만, 말끝마다 숫자를 붙인 팀은 더 길게 붙잡혔다. 국내외 VC, 퍼블리셔, 액셀러레이터 20여 명이 돌려 쥐는 사전 심사표에는 ‘투자 가능’, ‘퍼블리싱 협의’, ‘후속미팅’ 같은 작은 도장이 찍혔다. 누군가의 종이 위에서, 한 해의 피드백이 구조화되는 장면을 보는 건 꽤 희귀한 경험이었다. 투자자 라인업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소프트뱅크벤처스, 캡스톤, 케이큐브, 세종, 메가인베스트먼트, 그리고 해외 투자자와 퍼블리셔들이 섞여 있었다.

이름값은 거대한데, 평가는 놀라울 만큼 생활적이었다. “이 버튼은 왜 오른쪽이에요?”, “이 가격이면 왜 지금 사야 하죠?” 브랜드의 색채보다 제품의 일상성이 우선이었다. 한 엔젤리스트는 회의록에 이렇게 적었다. “썸은 NFC라는 접점을 재미로 풀었다. 다만 오프라인 설치 포인트의 비용 구조가 관건.” 그 문장을 훔쳐 읽은 대표가 눈을 번쩍 떴다. 좋은 피드백은 자존감을 건드리지 않고 방향을 틀게 한다. 모든 42팀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고, 결국 20팀이 다음 라운드의 마이크를 잡게 됐다. 종로의 오후가 저물어갈 즈음, 사회자가 이름을 불렀다. 서울 데이트팝, My Music Taste, 페ット라이프 케어, Dance School, 3D 마우스 앱 융합… 불릴 때마다 작은 박수와 큰 숨이 교차했다. 탈락은 완전히 진 것이 아니었다. 뒤편 테이블에선 “오늘 피드백으로 데모 다시 깎아서 20일 코엑스에라도 데려가겠습니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누구도 제로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의 투자 메모, 오늘의 리텐션, 오늘의 고객 반응. 모두 다음 무대를 위한 연료였다. 곧 코엑스다. 12월 20일, 컨퍼런스룸 317과 318호. 한쪽에서는 글로벌 진출 전략 특강과 트렌드 토크가, 다른 쪽에서는 스타트업 IR이 이어진다. 법률은 창업의 뼈대를 세우고, 성공사례는 살을 붙인다. 태평양과 Ropes & Gray의 변호사가 지식재산권과 미국 기업법을 풀어낼 것이고, Noom의 정세주 대표는 숫자와 서사를 함께 들려줄 것이다. “미국 맨해튼에서 시작한 작은 팀이 전 세계 1,800만 다운로드를 만들기까지”라는 제목 하나만으로도, 발표장의 공기 조성은 끝났다. 당신이 청중이라면 필기를, 창업자라면 질문을 준비해야 한다. 이 무대에서 가장 좋은 질문은 대개 단순하다.

“지금 우리가 집어야 할 첫 번째 레버는 무엇인가.” 현장에는 게임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점심시간의 행운권 추첨, 온라인 사전 등록자에게 나눠주는 기념품 박스, 그리고 무대 뒤 미니 스탠드에서 찍는 팀 사진.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작은 장치들이 긴 하루를 끝까지 버티게 한다. 창업은 장거리 달리기인데, IR은 스퍼트다. 스퍼트 사이사이에 작은 당 보충이 있어야 근육이 버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플랜과 피치가 엇갈리는 동안 누군가는 스폰서 로고가 찍힌 종이컵을 붙잡고 다짐을 새겼다. “오늘은 듣고, 3일 안에 바꾸고, 30일 안에 다시 피칭한다.” 만약 당신이 내일의 무대에 서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기억하자. 발표 시작 10초 전, 사회자가 팀 이름을 부르고, 조명이 조금 더 밝아지는 그 찰나. 긴 숨을 들이쉬고 첫 문장을 꺼낼 때, 당신은 전문 투자자가 아니라 동료 사용자에게 말을 건다고 상상하라. 문제는 작고 구체적으로, 해결은 명료하고 미려하게, 데이터는 실제 사용자에게서. 그 다음의 모든 것은 대화가 만든다.

질문이 던져지면 되묻고, 반론이 나오면 경로를 수정한다. 투자자는 당신의 기세가 아니라 당신의 반응 속도에서 팀의 체력을 본다. 투자자에게도 숙제가 남는다. 오늘의 메모를 정리하며 ‘좋았다’ 대신 ‘왜 좋았는가’를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관심 없음’의 이유를 한 줄 더 써야 한다. 초기 시장은 좁고 빠르기 때문에, 정확히 어디에서 설득이 막혔는지 파악하는 것이 이 생태계 전체의 학습 속도를 좌우한다. 사전 IR이 가진 가치는 여기에 있다. 선발식이 아니라 학습식. 누군가는 오른쪽 문으로, 누군가는 왼쪽 문으로 나가지만, 같은 문간을 두 번 지나가지는 않는다. 저녁 무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대표를 만났다. “세 문장을 버리기로 했어요.

남은 세 문장은, 꼭 제가 말해야 할 것들이거든요.” 그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고, 손에는 새로 받은 명함이 다섯 장쯤 쥐어져 있었다. 문장이 가벼워지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당신의 사업도 결국은 몇 개의 단단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고객이 왜 당신을 선택하는지, 그 선택이 어떻게 반복되는지, 반복이 어떻게 돈이 되는지. 그 세 문장을 완성하는 과정이, 종로의 3분과 코엑스의 하루에 흩어져 있다. 돌아보면 이날의 무대는 산업의 현재를 비추는 작은 프리즘이었다. 모바일의 다음, 크리에이터의 통로, 데이터의 언어, 법의 경계, 글로벌의 압력. 다양한 빛이 들어와 3분짜리 스펙트럼으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빨강을, 누군가는 파랑을 가지고 내려갔다. 색은 달랐지만, 모두에게 필요한 건 투명한 유리 한 장이었다. 제품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유리, 팀의 문장을 또렷하게 만드는 유리.

그 유리를 닦는 시간이, 바로 이런 사전 IR이다. 당신이 소상공인이라면 이 풍경을 남의 축제로 보지 않기를. ‘앱’이라는 단어를 ‘가게’, ‘메뉴’, ‘공간’으로 바꾸어도 공식은 변하지 않는다. 첫 15초의 문제 제기, 다음 60초의 해결, 나머지 시간의 증거와 미래. 동네의 작은 빵집이라도, 고객 앞에서 이 공식을 연습하는 순간 브랜드는 업그레이드된다. 피드백을 받으려 공간을 나누고, 질문을 유도하는 장치를 만들고, 오늘의 숫자를 내밀자.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당신을 키운다. 종로에서 코엑스로, 3분에서 18개월로. 성장의 단위는 언제나 사람의 목소리였다. 오늘도 누군가는 마이크를 잡는다. 그리고 내일, 당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