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잔잔한 주말 재즈와 키보드 타건 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유리벽을 통과해 햇빛이 반짝이는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의 공용 라운지, 긴 테이블 끝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활자보다 로그를 더 사랑할 듯한 공학자의 눈빛, 다른 한 사람은 질문과 대답을 번갈아 던지며 문제의 핵을 파고드는 경영자의 리듬. 소프트리에이아이의 문지형 공동 창업자 겸 CTO와 디에이엘컴퍼니의 김한나 공동 대표, 올해 파운더스 아카데미에 이름을 올린 두 스타트업의 얼굴이었다. 여성 창업가 리더십 멘토십 프로그램인 파운더스 아카데미는 아시아태평양에서 선발된 10개의 팀이 12주 동안 1:1 코칭과 그룹 워크샵을 통해 리더십, 팀 관계, 투자 유치 같은 ‘사람’의 문제를 깊이 훈련하는 자리다. 한국에서는 단 두 팀만이 최종 합류했다. 숫자만 보면 단출한 소식이지만, 이 두 팀의 문제의식과 실행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왜 이들이어야 했는가’가 곧 선명해진다. 먼저 소프트리에이아이.

이들의 문제는 간단하고도 거대하다. 온라인 커뮤니티, 그중에서도 라이브 스트리밍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상호작용을 어떻게 안전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것인가. 스트리머가 방송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수천 명의 채팅을 관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소프트리에이아이가 내놓은 해법은 스트림에이드라는 AI 봇. 스트리머가 정한 커뮤니티 규칙을 실시간으로 읽고, 위반 행위를 탐지하며, 방송 반응을 정량적으로 요리한다. ‘내가 방송에 몰입할 수 있게 무대 뒤를 치워주는 스테이지 매니저’ 같은 봇이라고 설명하면 감이 온다. 문지형 CTO가 이 문제에 꽂힌 계기는 몇 해 전, 연예·스포츠 뉴스 댓글로 촉발된 피해 논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는 당시 자연어처리(NLP)를 연구하며 온라인 혐오와 악성 표현을 기술로 줄일 수 있을지 논문을 냈고, 그 글을 본 사람들이 “함께 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팀은 커뮤니티의 성장과 안전성을 ‘언어를 이해하는 인공지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회사를 세우고, 채팅 데이터에 맞는 서빙 아키텍처와 여러 AI 모듈을 빠르게 쌓았다. 경쟁 대비 3배 성능을 보여주는 모듈, CBT와 오픈 베타를 향한 달리기, 정부 R\&D 과제 선정까지. ‘기술을 곧장 현장으로’라는 문장이 팀의 방법론처럼 느껴졌다. 소프트웨어의 품질은 팀의 리더십에서 완성된다는 걸 아는 문지형 CTO는 리더십을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나아가게 만드는 역량’이라고 정의했다. 누구나 아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정의는 매일의 실천을 요구한다. 개인의 장점을 더 빛나게 만드는 문화 설계, 기대 역량을 명확히 말하는 피드백, 목표와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방식 자체를 기민하게 바꾸는 유연성. 그는 “리더십 고민은 끝나지 않는 문제 해결”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기술 자체를 끌어올리는 데 능한 팀이 사람의 문제를 기술만큼 체계적으로 다루려는 태도, 그게 바로 성장의 가속 페달이다. 다음 주인공은 디에이엘컴퍼니. 이들의 미션은 분명하다. 여성들이 더 건강한 몸으로, 더 가슴 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출발점은 앱 ‘달채비’다. 월경과 호르몬이라는 누구나 겪지만 누구도 제대로 돌보기 어려웠던 일상의 문제를 루틴으로 바꾸는 서비스. PCOS(다낭성난소증후군)나 PMS(월경전증후군)를 겪는 사용자에게는 ‘유일한 관리 앱’이라고 스스로 소개할 만큼, 약·식단·운동·월경을 한 화면에서 연결하고 개인 상황에 맞춰 커스터마이즈한다.

세 공동창업자는 대학 수업 팀 프로젝트에서 시작해 교내 월경박람회를 열고 데이터를 모았다. 단 하루였지만 평균 체류 시간, 시간당 방문자 수가 기대를 훌쩍 넘겼다. 이후 10만 건이 넘는 월경 데이터를 쌓고 1만 명 이상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월경 타입 분석 알고리즘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했다. 몸 타입에 맞는 용품 추천, 증상별 피임약 타입 추천 같은 기능도 독자적으로 구현했다. TIPS 선정, 병원과의 MOU, 그리고 무엇보다 사용자들이 매일의 몸과 감정의 기록 속에서 “이제야 나한테 맞는 해결책을 찾았다”는 피드백. 디에이엘컴퍼니는 시장의 박수보다 현장의 끄덕임을 더 가까이 둔다. 김한나 공동 대표가 말하는 여성 창업가의 강점은 명료하다.

문제의 현장을 몸으로 겪고, 사용자와 같은 언어로 더 깊이 빠르게 대화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제품은 ‘더 나은 소비재’가 아니라 ‘더 잘 사는 몸’이라는 목표를 향한다. 동시에 여성 창업가로서 겪는 압박도 숨기지 않는다. 한 번의 실패가 개인이 아닌 성별 전체를 대변하는 듯한 무게. 그래서 그는 조언 대신 태도를 말한다. 실패에 의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실패에서 빠르게 배우며 다음 실행으로 넘어가는 것. 성장의 리듬은 거대한 결단 한 번이 아니라, 잦은 실험과 잦은 수정에서 만들어진다는 진실을, 팀은 몸으로 배우고 있다.

파운더스 아카데미를 앞두고 두 팀이 세운 목표는 다르지만 닮아 있다. 소프트리에이아이는 기술과 사업의 간격을 더 촘촘히 메워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려 한다. 영어권을 시작으로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는 로드맵, 자율 규제가 활발한 유럽 온라인 커뮤니티의 요구에 맞춘 제품 설계. 디에이엘컴퍼니는 제품의 굵직한 변화를 전제로 고속 가설 검증을 통해 차별화된 핵심 가설을 뽑아내고, 실행-학습-수정의 속도를 내는 팀을 다듬으며, 다음 라운드 투자로 뛰어오를 준비를 한다. 둘 다 이 프로그램을 ‘사람과 네트워크의 힘으로 시간을 단축하는 장치’로 본다. 글로벌 시장 정보의 비대칭을 줄여줄 멘토링과 코칭, 데이터 기반 인사이트, 그리고 데모데이로 이어지는 투자 네트워크. 결국 스타트업에게 가장 비싼 자원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한국 스타트업의 강점을 묻자 두 팀 모두 ‘실행력’을 첫손에 꼽았다. 배우는 속도, 고치고 다시 시도하는 속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 정부와 민간의 지원 프로그램,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 같은 네트워크는 초기에 자본과 경험이 부족한 팀에게 버틸 근거를 준다. 그 사이에 창업가 개인의 성장은 곧 회사의 성장으로 연결된다. 파운더스 아카데미가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품이 시장에서 겪는 굴곡은 결국 사람이 감당해야 하므로, 사람의 근육을 먼저 키운다. 두 창업가는 마지막 질문 앞에서 조금 멈췄다.

“앞으로의 꿈은?” 문지형 CTO는 라이브 스트리밍을 넘어 더 넓은 커뮤니티의 소통 문제를 다루는 팀으로 성장하겠다고 했다. ‘말’이 오가는 어디든 기술이 일할 수 있게. 김한나 공동 대표는 팀 디자이너가 말한 문장을 빌렸다.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서비스.” 그 말이 단순한 수사가 되지 않으려면, 매일의 제품과 커뮤니티 운영, 데이터와 윤리, 실행과 배려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꿈은 거대한 플래카드보다 일상의 루틴에 더 가깝다. 오늘도 몸의 신호를 기록하고, 오늘도 스트리머의 채팅창이 조금 더 맑아지는 것. 돌아 나오는 길, 라운지의 공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막 도착한 또 다른 팀이 화이트보드 앞에서 가설을 적고, 옆 테이블에서는 피치덱이 수정되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 곳곳에서 모인 여성 창업가들이 12주 동안 서로의 시행착오를 압축 공유하고, 각자의 언어로 해답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 한국의 두 팀, 소프트리에이아이와 디에이엘컴퍼니가 있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용기와 끈기, 그리고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리더십의 훈련. 우리가 이들의 다음 소식을 기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제를 똑바로 보고, 사용자 곁에서, 빠르게 배워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사람들. 스타트업 생태계가 가장 아끼고 확장해야 할 자산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